6世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선(義旋)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시(詩) 8
법호: 순암(順菴) 당호: 허정당(虛淨堂)이며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오대선사(玄悟大禪師), 자은군(慈恩君), 의선공(義璇公), 삼장공(三藏公),
조순암(趙順菴), 조의선(趙義旋), 삼장순암법사(三藏順奄法師), 선공(璇公)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고 칭송되었다.
삼장법사(三藏法師)는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에 통달한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로 경장은 부처의 말씀을 기록한 불경, 율장은 불교 제자들의
법칙과 규율을 기록한 불경, 논장은 부처의 말씀을 적은 경장의 해설서로,
의선은 삼장에 통달하여 삼장법사 호칭으로 불리웠다.
한국불교사상에서는 의선이 유일하다.
정숙공(貞肅公)의 4남으로 15세에 출가하여 천태종의 고승이 되었다.
중국에서 불도와 유자 사이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고려에서도 많은 불교 제자와 유자들을 문도로 두었다.
목은문고 제3권 / 기(記)
조씨 임정기(趙氏林亭記)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정숙공(貞肅公 조인규(趙仁規))이 충렬왕(忠烈王)을
보좌하며 원 세조(元世祖)를 섬겨 성대하게 원(元)나라의 관원이 되면서부터
여러 자제들이 모두 대관(大官)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둘째 아들인 충숙공(忠肅公 조연(趙璉))이 특히 중후(重厚)한 군자의 면모를
갖추었으므로, 지금까지도 칭송해 마지않고 있다. 그의 아들인 판서공(判書公)
이 병으로 사직을 청한 뒤에 평주(平州 평산(平山)의 옛 이름) 남쪽 철봉(鐵峯)의
동쪽에서 안식을 취하며 휴양하자, 그의 아들 형제가 옆에서 모시면서 아침저녁
으로 봉양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조씨의 임정(林亭)이 세워지게 된 연유이다.
판서공의 둘째 아들로서 통례문 판관(通禮門判官)으로 있는 조완(趙琬)이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 부모님이 여기에다 터를 잡고 사신 뒤로 대개 몇 년이
지나는 동안, 거처하실 곳도 그런대로 구비되었고 드실 음식도 그런대로 갖추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대개 우리 구씨(舅氏)인 사암공(思菴公) 유숙(柳淑)1)이 세상을
떠난 뒤로는 생활을 담박하게 하는 가운데 더 이상 맛보고 싶은 일도 없게 되었습
니다만, 형체를 잊음으로써 세상의 일도 자연히 잊게 되고 몸을 즐겁게 함으로써
마음도 자연히 즐겁게 되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부모님이 여생을 보내면서 후손을
보호해 주는 그 도리가 조금은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에 또 우리
형제가 화목하고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선침(扇枕)2)을
하고 있으니, 그 즐거움이 또 어떻겠습니까. 바야흐로 여름날의 경치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되면, 산 빛과 물 기운이 위아래에서 스며들어 촉촉이 적셔 주는 가운데,
비가 오려고 할 때의 풍경이라든가 갖가지 모양의 구름들이 아침저녁으로 바뀌어
가면서 우리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고 있으니, 이것은 또 하늘이 우리
조씨의 임정(林亭)3)을 완전무결하게 만들어 주려는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가 마음속으로는 실로 유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의 입으로 떠벌릴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또 이에 대해서
또 글로 남겨 두지 않는다면, 어버이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널리 드러낼 수가
없게 되어, 임정을 지은 것 역시 부역(賦役)을 피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
간 사람이나 명예를 구하기 위하여 승경(勝景)을 표방한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기문을 지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군자가 자기 어버이를 모실 적에는
심지(心志)와 구체(口體)의 봉양4)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조씨 형제와 같은 경우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조화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평주(平州) 고을로 말하면, 경읍(京邑)과 거리가 가까운 관계로 사대부의
별장이 많기도 한데, 벼슬을 하고 있거나 그만두었거나 간에 왔다 갔다 하기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따라서 조씨 형제들도 관청의 일이 조금 한가하거나
휴가를 얻을 틈이 생기면 필마(匹馬)로 드나들곤 할 테니, 어찌 유독 임정에서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는 일만 서술할 수가 있겠는가. 그 도로 상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하는 흥치 역시 형제들 스스로 터득한 점이 또 깊으리라고
여겨진다. 나는 병이 들어서 문밖으로 나가 보지 못한 지가 벌써 몇 년이나
되었다. 그래서 조씨 형제에 대해서 더욱 부러운 마음이 들기에,
끝에다 이 점을 조금 언급하게 되었다.
백씨(伯氏)5)는 이름이 조호(趙瑚)로, 나의 문생(門生)6)이다.
1) 구씨(舅氏)인 사암공(思菴公) 유숙(柳淑) : 8世 조호, 조완의 외숙부이다.
2) 선침(扇枕) : 어버이를 극진하게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황향(黃香)이
무더운 여름철에는 어버이를 위해 위해 침상에서 부채를 부쳐 시원하게 해 드리고
(扇床枕), 추운 겨울철에는 자신의 체온으로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해 드렸던
(身溫席) 고사가 전한다. (東觀漢記 黃香)
3) 임정(林亭) : 숲속의 정자
4) 심지(心志)와 구체(口體)의 봉양 : 심지의 봉양은 어버이의 뜻에 맞추어 드리는
것을 말하고, 구체의 봉양은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해 드리는 것을 말하는데,
맹자 이루상(離婁上)에 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5) 백씨(伯氏) : 남의 맏형을 높혀 이르는 말 (여기서는 8世 조호를 말함)
6) 문생(門生). : 고려시대 과거 고시관을 지공거, 동지공거라 부르고 합격자들을
자기의 제자로 인정했음. 또한 합격자들은 고시관을 스승으로 여기며 부모와
동일시하고, 혼맥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음.
주석 : 조씨임정기는 목은문고 제3권 기(記)와 동문선 제73권 기(記) 수록되어 있고,
7世 판서공(判書公) 조윤선 두아들 8世 조호, 조환의 효행을 나타내는 글이다.
목은문고 제8권 / 서(序)
휴상인(休上人)에게 준 글
내 나이 열예닐곱 살 때쯤에 유자(儒者)들과 어울려 연구(聯句)를 짓고 술을 마시
면서 노닐곤 하였다. 그런데 지금 천태판사(天台判事)로 있는 나잔자(懶殘子)가
우리들을 좋아한 나머지 모두 초청하여 함께 시를 지으면서 읊조리다가 날이
부족하면 다시 밤까지 계속 이어 갔으며, 술이 얼큰해지면 고담준론에다 장난기
어린 우스갯소리를 허물없이 늘어놓기도 하였다. 그때 오선생(吳先生)이란 분이
가끔씩 찾아와서 모임에 참여하곤 하였는데, 모습이 청수(淸秀)한 데다 말솜씨도
능란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휴상인(休上人)은 바로 그분의 아들이다.
오 선생이 상인에게 명하여 나잔자를 모시고 공부하도록 하자, 상인이 논어
(論語)와 맹자(孟子)에 대한 내용을 배우고 나서는 그 곁을 떠나서 삼각산(三角山)
으로 들어갔다. 이듬해인 갑신년(1344, 충혜왕5) 정월에 나잔자가 또 우리들 몇
사람을 데리고 삼각산으로 놀러 갔는데, 그때 휴 상인이 우리를 위해서 동도주
(東道主 손님 접대하는 주인)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상인은 나보다 몇 살 더 많았
으나 나하고 무척 사이가 좋았는데, 그 뒤로부터는 서로 만나는 일이 드물었을뿐
더러, 아예 얼굴조차 보지 못한 지가 또 오래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함께 노닐었던
정랑(正郞) 홍의원(洪義元)과 상사(上舍) 오동(吳仝)과 내시(內侍) 김정신(金鼎臣)
같은 이들은 이미 모두 고인(故人)이 되었고, 지금의 광양군(光陽君) 이공(李公)과
나만 외로이 조정에 몸담고 있을 뿐, 중랑(中郞) 김군필(金君弼)과 정랑(正郞)
한득광(韓得光)은 모두 시골에 내려가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상인이 이런 때에
나의 문을 두드릴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나잔자가 또 시자(侍者)
편에 나에게 급히 서한을 보내 상인에 대한 일을 매우 자세하게 말해 주었는데,
이는 내가 옛날의 일을 잊어버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이에 내가
그 글을 보고 그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옛날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상인은 사중은(四重恩)을 갚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나가는 면에 있어서도 나름대로의 원칙을 지니고 있었다.
또 그의 말을 들어 보건대, 부처의 형상이나 부처의 언어 모두가 불도(佛道)에
들어가는 데 특히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제자인 도우(道于)와 달원(達元)으로
하여금 지묵(紙墨)의 시주를 받아서, 주해(註解)가 붙어 있는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을 각각 1부씩 찍어 내도록 하였고, 또 설법(說法)을 통해서 얻은
보시(布施)를 가지고 서방 정토의 아미타불과 팔대 보살(八大菩薩)을 그려
장명등(長明燈) 아래에다 안치(安置)하였으며, 남은 정재(淨財)는 불경을 찍는
비용에 보태 쓰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상인이 다시 말하기를, “법보(法寶
불경(佛經))가 일단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내 나이가 벌써 60에 가까운 만큼
혹시라도 받들어 간수하는 데에 소홀하게 된다면 앞으로 다른 걱정거리가 없으리
라고 보장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장차 오대산(五臺山)에 안치하고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할까 하니, 선생이 이 일에 대해서 한마디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한다.”
하였다.
나는 불씨(佛氏)에 대해서 당초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과(因果)에 대한
설이라든가 돈오(頓悟) 점수(漸修)의 설 등에 대해서도 모두 알지를 못하니,
내가 어떻게 감히 언급할 수 있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상인의 이야기 가운데
‘위로 사중은(四重恩)을 갚으려 한다’는 말을 들어 보면, 우리 유가(儒家)의 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듯도 하다. 지금은 풍속이 모두 무너져서 아비와 자식의
관계가 서로 어긋나고 형과 아우가 서로 도모하는가 하면 역신(逆臣)이 잇따라
일어나고 완악한 백성들이 자꾸만 난리를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부도씨(浮屠氏)가 천륜(天倫)을 무시하면서도 오히려 이처럼 사중은을 갚을 줄을
알고 있으니, 어찌 기뻐서 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상인으로 말하면
나의 옛 친구요, 여기에 또 나잔자의 청까지 앞세웠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래서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1) 사중은(四重恩) : 불교 용어로, 부모(父母)와 중생(衆生)과 국왕(國王)과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의 은혜를 말한다.
2) 팔대 보살(八大菩薩) :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보호하는 여덟 보살로,
보통 관세음(觀世音) 미륵(彌勒) 허공장(虛空藏) 보현(普賢) 금강수(金剛手)
묘길상(妙吉祥) 제개장(除蓋障) 지장(地藏) 등의 보살을 가리킨다.
주석 : 목은 이색과 6世 삼장법사 의선의 제자인 나잔자(懶殘子)와 오선생
(吳先生)아들 휴상인(休上人)과의 인연을 적은 글. 광양군(光陽君) 이공
(李公)은 광양이씨 시조 광양부원군(光陽府院君) 이무방(李茂芳)으로
8世 조준의 동지공거(同知貢擧)였으며, 지공거(知貢擧는 염흥방(廉興邦)인데
정숙공의 외증손자이다. 목은 이색은 목은집에 동정(東亭) 염흥방과 교유한
수 많은 시를 남겼다.
목은문고 제8권 / 서(序)
율정(栗亭) 선생의 일고(逸藁)에 붙인 서문
문장은 외적(外的)인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는 마음속에 박혀 있다. 그런데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시대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읽을 때면 풍아(風雅)의 정변(正變)에 대해서 감회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뒤 세상이 더욱 어지러워진 말세(末世)에 들어와서는, 장구(章句)의 수준이
날이 갈수록 저하되기만 하였으니, 정음(正音)이 다시 지어지지 않아도 부끄러
워할 것이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다행히 봉황새 한 마리가 출현
하여 뭇 잡새들 속에서 외로이 울어대는 때가 있기도 하지만, 그 소리마저 바람
따라 떠나가 버리기 일쑤이고, 떠나간 때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소리의
여운조차 얻어 들을 수가 없으니, 아, 슬픈 일이라고 하겠다.
율정(栗亭 윤택(尹澤)) 선생은 그 그릇이 원래 웅위(雄偉)한 데다, 춘추(春秋)에
통달하고 소통(蕭統)의 《문선(文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였으므로, 제대로 된
문장이 여기에서 또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선생의 좌주인 익재(益齋 이제현
(李齊賢)) 선생께서도 공의 문장에는 예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다고 여러
차례나 칭찬하였던 것인데, 지금 문집에 수록된 것이 이 정도로 그치고 만
것은 어찌 된 연고인가? 공이 금산(錦山)에서 노년을 보낼 적에 일찍이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가옥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면서 문서도 함께 모조리 없어지고
말았으므로, 손자인 소종(紹宗)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만을 여기에다 수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선생의 사위인 기거랑(起居郞) 허식(許湜)은 글을 잘하는 분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조(操)가 군부사 총랑(軍簿簿司摠郞)에 지제교(知製敎)를 역임
하고, 지금은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가 있는데, 장차 이 문집을 간행
하려 하면서 나에게 서문을 요청해 왔다. 나는 소싯적에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
고서 공부하였고, 기거공(起居公)이 또 나의 몽매함을 깨우쳐 주기도 하였으며,
소종(紹宗)이 나의 문생이 된 인연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여러 의리를
헤아려 볼 때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었으므로 곧장 이렇게 쓰게 된 것인데,
선생의 출처(出處)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은 국사(國史)에 실려 있기에 여기서는
췌언(贅言)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1) 풍아(風雅)의 정변(正變) : 시경(詩經)에 나오는 공명정대한 시와 퇴폐적인
시를 말한다. 풍아는 《시경》 국풍(國風)과 대아(大雅)ㆍ소아(小雅)의 약칭
으로, 보통 시경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국풍 가운데 정풍(正風)은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가리키고, 변풍은 패풍(邶風) 이하 빈풍(豳風)까지의 13국의
작품을 말하며, 대아와 소아에도 각각 주(周)나라의 흥망성쇠에 따른 정아
(正雅)와 변아(變雅)가 있다.
주석 : 율정은 무송윤씨 윤택(尹澤)으로 8世 조준의 어릴적 스승이다. 윤택은
고모부인 파평윤씨 윤선좌(尹宣佐)에게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배우고,
제자 조준도 대학연의를 중요시하여 이방원이 왕자 시절에 전달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책이라고 하였으며, 태종때 처음 목판복으로 간행하고,
세종, 정조 등도 여러 차례 국가에서 간행하여, 왕과 사대부에게 필독서로
사랑받았다. 대학연의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의 사서중 하나인 대학(大學)의
해설서이다. 소종(紹宗)은 윤택의 손자 윤소종으로, 이색의 제자이며,
8世 조후(趙煦)의 아랫동서이다. 이색의 어릴적 스승 기거랑(起居郞)
허식(許湜)은 양천허씨로 6世 조련, 조연수의 외5촌 조카이다.
목은문고 제20권 / 전(傳)
백씨전(白氏傳)
백씨(白氏)의 이름은 인(璘)이니, 서림(西林 서천(舒川)의 옛 이름) 사람이다.
나는 그와 어렸을 때부터 벗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선군(先君)인 가정공(稼亭公)
이 정해년(1347, 충목왕3)에 지공거(知貢擧)를 맡았을 적에 백씨가 을과(乙科)로
뽑혔으니, 그는 나의 동문(同門)인 셈이다. 서림은 우리 한산(韓山) 땅과 경계가
맞닿아 있어 두 집안이 매우 가까웠다. 그래서 총각(總角) 시절부터 서로 교유
(交遊)하면서 숭정사(崇政寺)에 들어가 함께 글을 읽기도 하였으니, 그는 나의
동학(同學)인 셈이다. 지금 천태(天台)의 나잔자(懶殘子)가 일찍이 유자(儒者)
들과 어울려 노닐기를 좋아하면서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시를 또 곧잘 강독
하였으므로, 유자들이 몰려와서 그의 강의를 듣느라고 매일 자리를 가득 메우곤
하였다. 그중에 호걸스러운 자들이 결사(結社)를 하여 서로의 믿음을 보였는데,
그때 백씨가 실로 그 일을 주관하였으니, 그는 나의 동지(同志)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백씨를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가 없는데, 그 사람됨을 알고서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인인(仁人)의 마음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부친의 휘(諱)는 함정(咸正)이다. 내시부(內侍府)의 속관(屬官)으로 벼슬을 하였
는데, 여럿이 함께 있을 때에도 반드시 예법을 준수하였다. 그리고 여러 원장
(院長)들이 조금이라도 법을 어기거나 외설스러운 말로 농담을 던지기라도
하면, 반드시 발끈 성을 내며 일어나서는 “나의 부친이 나의 이름을 함정이라고
지어 주셨으니, 어찌 조금이라도 치우치게 행동하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라고 말하곤 하였으므로, 세월이 오래 흐른 뒤에도 여러 원장들이 이 일을
거론하며 탄복하였다. 관직이 통례문 사인(通禮門舍人)에 이르렀다. 모친
김씨(金氏)는 상주(尙州) 사람으로 고사(庫使)를 지낸 휘 인통(仁通)의 딸이다.
백씨의 동생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소(玿)이다. 도평의사사(都評議司使)의
지인(知印)을 거쳐 도관 정랑(都官正郞)을 거친 뒤에 지금 모관(某官)으로 있
는데, 유능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백씨는 모관(某官)인 기주(奇輈)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1녀를 낳아 모관 모에게 출가시켰으며, 다시 모관인 정모(鄭某)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백씨는 머리가 총명하고 기억력
이 비상하였는데, 그런 면에서는 근세(近世)의 인물 중에서 아마도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내가 백씨와 현주(見州 양주(楊州)의 옛 이름)의 승방(僧房)
에 함께 있을 적에, 하루는 글 읽은 것을 배송(背誦)해 보기로 서로 약속하였
는데, 백씨는 점심때가 채 되지 않아서 다 외운 데 반하여, 나는 날이 어두워
져서야 겨우 마칠 수가 있었다. 그렇게 1년을 지내고 나서 다시 서림(西林)의
승방에 함께 머물 적에, 밤에 등불도 없이 누워 있다가 입으로 장기(將棋)를
두었는데, 그다음 날 복기(復棋)를 해 본 결과, 백씨는 길 하나도 틀리지 않은
데 반하여 나는 두 군데나 겹쳐 놓은 것이 판명되었다. 이런 일들이 하도
많아서 내가 지금 죄다 기록해 놓을 수는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백씨가 어떠
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씨는 한 끼에 몇 사람 분량의 밥을 먹으면서도 그다지 배부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또 힘이 장사였기 때문에 제아무리 날쌔고 용맹스럽다고 자부하는
자라 할지라도 감히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그가 지은 문사(文辭)를
보면 그 기운이 마치 긴 무지개처럼 뻗쳐 올라가서 그 형세를 스스로 걷잡을
수 없는 점이 있었으며, 필적(筆跡) 또한 그다지 속되지 않아서 일찍이 우리
조모님의 묘지명(墓誌銘)을 쓰기까지 하였으니, 선인(先人)께서 필시 취한
점이 있으셨을 것이다. 을미년(1355, 공민왕4) 가을에 내가 원(元)나라 응봉한림
(應奉翰林)의 직책을 맡고 있다가 이듬해에 귀국하려고 할 적에, 백씨와 함께
하룻밤을 지내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 그가 객지에서 극심
한 곤란을 겪고 있었으나 뜻만은 조금도 쇠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대개 공명(功名)에 뜻을 두고 있었는데, 끝내는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연경
(燕京)에서 죽어 초라하게 묻히고 말았으니, 아,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다.
주석1 : 백씨전의 백린(白璘)은 남포백씨 백함정의 아들이다. 정숙공의 사위 백효주의
인척으로 보이며, 가정공은 이색의 부친이며, 6世 삼장법사와 관련된 많은 글을
남겼다. 8世 묘혜와 이색이 원의 수도 대도(북경)에서 인연이 있었던 것처럼
백린(白璘) 또한 6세 삼장법사 의선의 제자인 나잔자와도 인연이 있었다.
주석2 : 목은 이색이 목은집에 기록한 6世 삼장법사 의선과 그의 제자들과 교유한
기록은 여기까지 이다. 목은 이색은 고려말에 8000여편의 시와 글, 묘지명을
남겨서, 저서인 목은집에는 우리 평양조문과 관계된 기록이 더 많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주석 : 이색(李穡, 1328~1396) 호는 목은(牧隱), 자는 영숙(潁叔).
가정 이곡의 아들이며. 익재 이제현의 제자이고.
정숙공의 외손자 곡성부원군 염제신의 처조카 사위이다.
8世 조호(趙瑚)의 스승이며, 조선의 유학자들의 스승이다.
출처 : 평양조씨대동보, 이색 목은집, 한국고전번역원, 고려사, 한민족대백과사전.
작성 : 26세손 첨추공파 충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