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世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선(義旋)과 유항(柳巷) 한수(韓脩) 시(詩) 2
법호: 순암(順菴) 당호: 허정당(虛淨堂)이며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오대선사(玄悟大禪師), 자은군(慈恩君), 의선공(義璇公), 삼장공(三藏公),
조순암(趙順菴), 조의선(趙義旋), 삼장순암법사(三藏順奄法師), 선공(璇公)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고 칭송되었다.
삼장법사(三藏法師)는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에 통달한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로 경장은 부처의 말씀을 기록한 불경, 율장은 불교 제자들의
법칙과 규율을 기록한 불경, 논장은 부처의 말씀을 적은 경장의 해설서로,
의선은 삼장에 통달하여 삼장법사 호칭으로 불리웠다.
한국불교사상에서는 의선이 유일하다.
정숙공(貞肅公)의 4남으로 15세에 출가하여 천태종의 고승이 되었다.
중국에서 불도와 유자 사이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고려에서도 많은 불교 제자와 유자들을 문도로 두었다.
한수(韓脩) 유항집(柳巷集)
목은 선생의 시에 차운하여 희암 대사도께 받들어 드리다 3수
도가 출중한 희암과 무외암은 / 道出煕菴無畏菴
이름을 중국에 드날리고 뭇 절을 거느리네 / 名陽中國統提籃
윗자리에서 일찍이 한 사람의 총애를 입었으나 / 上相曾荷一人眷
속인을 불러 돌처럼 많은 사람의 말을 따랐네 / 摩塵却從群石談
몇 년 동안 산과 바다에서 멀리 꿈을 수고롭게 하였던가? / 出海幾年勞遠夢
오늘은 차를 마시며 서로 기쁘게 어울리네 / 茶介今日喜相叅
나는 얕은 물과 같이 더러움이 심한데 / 我如尺水汚泥甚
그대의 천 길 못처럼 교결함을 사랑하네 / 皎潔愛公千丈漂
충주의 빼어난 곳인 고암에 누웠으니 / 忠州勝處臥孤菴
물빛과 산 빛이 모두 우거지고 푸르렀네 / 水色山光摠蔚藍
와서는 국저를 위하여 긴 명을 빌고 / 來爲國識祈永命
때로는 벗을 찾아 현묘한 이야기를 늘어놓네 / 時壽親友縱玄談
소녀시절에 절에서 함께 배운 것이 생각나고 / 少年蕭寺思同學
중년에 연도에서 찾아갔던 일이 기억나네 / 中歲燕都記往叅
머리 돌리니 아득하여 참으로 한바탕 꿈 같은데 / 回首悠悠眞一夢
지금도 옛날처럼 달은 못을 비추고 있네 / 至今依舊月臨潭
공을 낭패시켜 산 속의 암자에 폐치하니 / 使公狼狽置山菴
노기의 후신들은 도리어 쪽빛을 띠었다네 / 盧杞後身猶色藍
공관, 가관, 중관에서 일찍이 얻음이 있었지만 / 空假中觀曾有得
오고 간 이제까지의 일을 어찌 말로 형용하리요? / 去來今事豈容談
몇 편의 시는 마음을 씻어 내는 데 긴요하고 / 數篇詩要心源洗
한 가닥의 향은 콧구멍을 소통시키는 데 도움되리 / 一炷香從鼻觀叅
무생을 끌어옴이 허락된다면 / 汲引無生如許諾
나는 아마 쓸쓸하게 강가를 거닐 텐데 / 我應搖落任江潭
주석 : 희암대사도(煕菴大司徒)는 7世 조덕유의 사남 조순(趙恂)으로 법명은 묘혜(妙慧)이다.
목은 이색의 "장차 희암 대사도(煕菴大司徒)를 알현하기 위해 유동(柳洞)을 출발하여
유동(柳洞)을 출발하여" 란 시의 차운하여 한수, 이숭인의 시가 있다.
희암은 삼장법사(三藏法師)의 호를 수여받은 의선의 조카이자 제자이다,
정숙공의 증손자로 희암이 간행한 법화삼매참조선강의 (法華三昧懺助宣講義)는
경주 기림사(祇林寺)에 있는데 보물로 지정되었다.
무외암(無畏菴)은 5世 무외국통 정오(無畏國統 丁午) 혼기(混其)이다.
한수의 시에서 처음으로 무외암(無畏菴)이란 표현이 나온다.
왜적을 격파한 이찬성을 받들어 축하드리며 한산군의 시에 차운하다.
젊은 사람처럼 시체를 지는 일을 함께 할 수는 없는데 / 弟子輿戶靡所同
근심 없는 사람으로 지금 공을 뵙네 / 丈人無咎見今公
어찌 다만 적을 깨드리는 데만 기이한 책략이 많으리요? / 豈惟破賊多奇策
모든 군대 일을 행함에 옛날의 풍도가 있네 / 全是行師有古風
만백성은 모두 사명을 얻음을 기뻐하는데 / 萬姓皆欣得司命
사방에서 어찌 감히 영웅을 다투리요? / 四方何敢望爭雄
도량이 참으로 바다와 같음을 알려고 하는데 / 欲知度量眞如海
세상을 뒤덮는 공을 이루고도 그 공을 자랑하지 않네 / 盖世功成不伐功
주석 : 1382년 찬성사 이성계(李成桂)는 1383년 8월 원의 잔당인 여진족 호발두(胡拔都)를
격퇴하였는데, 한수의 6촌인 한경(韓卿)의 사위인 이성계의 공적을 시로 기록함.
한수는 7世 조굉, 조천미의 외사촌 한악(韓渥)의 손자이며, 개국공신 한상경의
부친이다. 한수의 6촌인 한경(韓卿)의 따님이 태조 이성계의 부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이다. 태조 이성계는 10世 조무영의 외증조부이다.
엄광사의 대선사가 새 차를 부쳐 보내다.
차를 따는 일이 바닷가에서 다 회복되었다고 하지만 / 埰茶難復海邊皆
오직 엄광사의 물건이 가장 아름답네 / 唯有嚴光品最佳
나는 묘련사에 있을 적부터 이 맛을 알았는데 / 我自妙蓮知此味
번거롭게 스님이 멀리 보내어 나의 회포를 달래 주네 / 煩師遠奇慰予懷
주석 : 한수는 십대 후반에 5년간 묘련사에서 공부를 하였고, 이때 차 맛을 알았는데
밀양 엄광사(嚴光寺)에서 만든 차가 가장 좋다는 내용. 엄광사는 폐사되었지만,
밀양시 산외면 엄광리에는 다촌(茶村), 다원(茶院)이라는 마을이 있고,
지금도 차를 생산하고 있다. 개경 남문 부근에 있던 묘련사는
5世 무외국사 정오가 주석하였으며, 6世 삼장법사 의선이 크게 중창하여
고려말 성리학자들이 공부하고, 교류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했다.
앞의 운을 써서 염도정께 부쳐 드리다. 2수
십년 재상인데도 살쩍이 아직 검은데 / 十年宰相鬢猶淸
다시 유풍을 떨쳐 묘정을 빛내네 / 再振儒風奐廟庭
세상에 누가 안식을 갖추었는지 물으면 / 若問世間誰具眼
당시의 초은과 사정이라고 하리 / 當年樵隱與思亭
제멋대로 푸른 풀과 잔디가 보기 싫어 / 厭見草茅隨意淸
어린 아이에게 뜰을 정리하도록 하고 싶네 / 欲敎童稚理園庭
듣자니 공에게는 고기에 못지 않은 채소가 있다 하니 / 聞公油菜可當肉
좋은 종자를 시골집에 보내준들 어찌 해가 되리요 / 嘉種何防奇野亭
주석: 동정(東亭)은 파주염씨 염흥방의 호이다. 염흥방은 1362년 태조 이성계 등과
홍건적 2차 침입 격퇴 공신이며, 1374년 최영과 제주도에서 원의 세력이
일으킨 목호의 난을 진압했고, 3번이나 과거를 주제하여 수 많은 인물을
뽑았는데 8世 조준, 의령남씨 남은, 한수의 아들인 한상질(韓尙質), 맹사성
(孟思誠), 길재(吉再), 심온(沈溫)등이다. 쇠락한 성균관을 다시 중흥시키는등
많은 업적이 있었다. 그러나 1375년 이인임을 탄핵했다가 유배를 겪은 후에
이인임의 편당이 되어, 토지를 뺏았고, 탐하는 것을 일삼아 친구이자 친척
이었던 이색마저 나라를 그르칠 사람이라고 하였다.
초은(樵隱)은 성주이씨 이인복(李仁復)의 호이다. 이인임의 형이다. 시문집
초은집(樵隱集)은 전하지 않는다.
사정(思亭)은 언양김씨 김희조(金希祖)의 호이다. 익재 이제현의 사위이며,
1357년(공민왕 6) 이인복과 과거를 주관하여 염흥방, 창녕성씨 성석린
(成石璘), 양천허씨 허금(8世 조준의 친구), 여흥민씨 민제(9世 조박과
태종 이방원의 장인) 등을 뽑았다.
윤소종 대제 어머니 최씨의 만사. 2수
인간 세상에서 오기하도고 또 다섯 해 동안 / 五紀人間又五年
두 구슬이 계수나무 가지에 이어짐을 눈으로 보았네 / 雙柱眼見桂枝連
오늘 신선의 수레가 멀어짐을 탄식하지 마시라 / 莫嗟今日仙軿遠
남은 경사가 응당 장차 수많은 잎새로 전해지리 / 餘慶應將萬葉傳
맏아들은 가장 나를 잘 아는데 / 家督最知吾
담박한 사귐이 끝내 달라지지 않네 / 淡交終不倫
내당에 올라가도 다시 바라볼 사람이 없으니 / 升堂無復望
종이를 앞에 두고 다시 놀라서 소리치네 / 臨地更驚呼
주석 : 무송윤씨 윤소종의 부인과 8世 조후의 배위는 남매지간으로 함양박씨
박경의 따님들이다. 박경의 부친은 박충좌로 정숙공의 사위 남포백씨
백효주의 형인 백이정의 제자이다. 윤소종은 1345~1393.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자는 헌숙(憲叔), 호는 동정(桐亭), 동헌(桐軒)이다.
찬성사(贊成事) 윤택(尹澤)의 손자이고 이색(李穡)의 문인이다.
8世 조준의 송당집(松塘集)에도"대제 윤소종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尹待制紹宗慈氏挽詞) 시가 있다.
곡성부원군 염충경공의 만사.
달존 셋을 겸했으니 해동의 으뜸이요 / 兼達尊三冠海東
청명한 기질은 세상세 같은 이가 없네 / 淸明氣質世無同
두 왕조의 예악을 도무 지극히 궁구하였으니 / 兩朝禮樂皆硏極
한 시대의 공명은 누구와 풍성함을 비기리요? / 一代功名孰比豊
나이가 팔순에 가까워도 오히려 경계하였고 / 年진八旬猶儆戒
경사는 여러 아들에게 흘러 모두 영웅이네 / 慶流諸子揔英雄
공은 오늘 남은 한이 없으리라는 것을 아나니 / 知公批日無遺恨
어찌 곽분양에게만 시종여일함이 있을 뿐이라? / 何翅汾陽有始終
주석 : 정숙공의 외손자 파주염씨 염제신(廉悌臣1302~1382)의 호는 매헌(梅軒),
자는 개숙(愷叔), 처음 자는 불노(佛奴)이다. 안동권씨 권한공(權漢功)의 딸과
혼인하여 3남 5녀를 낳았다. 염국보(廉國寶), 염흥방(廉興邦), 염정수(廉廷秀)로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첫째 딸은 홍징(洪徵)에게, 둘째는 임헌(任獻)에게,
셋째는 정희계(鄭熙啓)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넷째 딸은 공민왕의 비인 신비(愼妃)
이며, 막내딸은 이송(李悚)에게 에게 출가하였다.
원에서 관직을 역임하다 모친의 병환으로 귀국하여, 정동행성의 관리들의 정사를
농단하자 염제신이 힘껏 싸워 많은 것을 제지 시켰고, 전민(田民)에 대한 송사
(訟事)는 모두 유사(有司)로 환송시켰다. 충숙왕이 청렴함과 강직함에 감탄하여
신임하였고, 염제신이 중요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믿지 않고 일을 멈추었다.
관리들이 이를 보고 뇌물을 바치고, 아첨하려는 자가 많았지만 염제신은 모두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관리의 기강을 중시하고, 인재들을 아꼈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공민왕이 초상화를 직접 그려주었고, 1991년 보물 제 1097호로 지정되었다.
주석 : 청주한씨 한수(1333~1384). 호가 유항(柳巷)이고. 자는 맹운(孟雲)이며,
시호는 문경(文敬), 봉호는 상당군(上黨君), 청성군(淸城君) 시서(詩書)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색(李穡), 염흥방(廉興邦) 등과 교분이 깊어
수많은 시를 주고받았다. 또한 예서(隷書)와 초서(草書)에 모두 능해 당대의
명필(名筆)로 이름났다. 노국대장공주묘비(魯國大長公主墓碑),
회암사지공대사탑비(檜巖寺指空大師塔碑) 현존하는
여주 신륵사보제선사사리석종비(神勒寺普濟禪師舍利石鐘碑)는
한수의 필적이며, 6世 조위의 묘지명도 한수의 필적이다.
7世 조굉, 조천미의 외사촌 한악(韓渥)의 손자이며, 개국공신 한상경의 부친이다.
번역 : 국학자료원. 성범준 박경신.
출처 : 평양조씨대동보, 유항집(柳巷集), 고려사, 한민족대백과사전.
작성 : 26세손 첨추공파 충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