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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행적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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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18世 경(儆)의 네 아들 중 넷째 아들로, 자는 집중(執中)이며 시호는 무의공(武毅公)이다.


부모님의 음덕으로 선전관(宣傳官), 내승부정(內乘副正) 훈정별군직(訓正別軍職) 도정(都正), 승지(承旨), 금별훈중좌우포장(禁別訓中左右捕將), 총융사(摠戎使), 병·형·공·참판(兵·刑·工·參判), 한성좌우판윤(漢城左右判尹), 同 의금어영훈련대장(義禁御營訓練大將), 장용위내외정 (壯勇衛內外正)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 공 형조판서(工·刑曹判書), 지의금(知義禁)과 외직으로 수원유수(水原留守) 外에 용천, 부영, 수원, 선천부사(龍川, 富寧, 水原, 宣川府使), 양주목사(楊州牧使), 충청수사, 병사(忠淸水使, 兵使), 황해북병사(黃海北兵使), 통어사 제사 (通御使 制使) 등의 벼슬을 지냈다. 


공의 업적 중 역사에 기리 빛날 일은 무엇보다 화성을 축성한 일이다.


화성 축성은 지금으로부터 약 210여 년 전인 조선왕조 22대 정조 때 (1793년 2월 28일) 팔달 .장안 두 대문과 북수. 남수 두 수문 건립을 위한 터 닦기 공사와 하천의 물 돌림부터 시작하여 2년 7개월만인 1796년 9월 10일에 완성되었다. 화성은 장대한 규모로 우리나라의 축성 사상 하나의 걸작이 아닐 수 없으며 또한 그 가치는 세계적으로도 높이 평가되어 1997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와 같은 고성, 즉 화려한 화성을 성축함에 있어서 정조께서는 특별히 신임하시는 우리 평양조씨의 당시 훈련대장인 공을 감동당상(監董堂上 : 監督官)으로 임명하여 실제로 직접 지휘 감독하도록 하였으며 수원유수(1794. 2.~1797. 7.)도 겸하게 하였다. 이는 곧 우리 문중의 명예스러운 영광이 아닐 수 없으며 후세까지 오래도록 역사에 남을 자랑스러운 일이다. 


화성축성을 위하여 감동당상(監董堂上)으로 임명된 과정과 축성 현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정조는 총융사(摠戎使)인 공을 수원부사로 삼아 천장(遷葬)에 모든 책임을 지고 화성축성에 앞서 사도세자의 이장을 주관하도록 명하였다. 공을 특별히 수원부사로 명하심은 왕께서 사도세자의 묘소인 영우원의 이장에 관하여 새 자리를 의논해서 수원에다 마련하기로 하고 먼저 읍을 옮기기로 하였는데 문무관중에서 이 큰일을 맡아야 할 사람은 공이 아니면 적임자가 없다 하니 왕께서 공에게 명하였다. 이에 공은 수원 팔달산(八達山) 아래에 새 읍치의 터를 물색하고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 현륭원에 무사히 이장하였다. 그 후 정조 15년에 수원부사인 공을 훈련대장으로 제수하였다. 


이어 화성축성 적임자를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였는데 상께서 “누가 적합하겠는가?” 하니 여러 공신들이 한 목소리로 아뢰기를, “조심태 훈련대장 외에는 적합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수원부사 때 구읍을 신읍으로 옮길 때부터 바친 공로가 이미 많았고 또 감독하는 일에도 익숙합니다.” 하니 상이 마침내 훈련대장인 공을 감동당상 (監董堂上=축성감독 최고 책임자)으로 삼고 공에게 총괄하여 살피는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같은 해 12월 감동당상인 공께서는 화원(畵員)을 데리고 수원에 가서 성터뿐만 아니라 부내(府內)의 지형지세까지 그리도록 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성의 벽면에는 길게 홈을 파서 뚫은 구멍으로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도록 하였고, 팔달산 정상에 장대(將臺)를 설치하여 사방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성터의 둘레는 3,600步로 정하였고 성곽의 모양은 남, 북으로 약간 갸름한 버들잎 모양으로 하였다. 정조 18년에 성터를 다지는 공사에 착수하였고 성곽시설의 터를 차례로 닦고 건물을 착공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7개월간의 축성 공사를 완전히 마치고 성대한 낙성연을 10월 16일에 베풀었다. 공의 업적은 화성축성의 화려한 낙성연에서 문중(門中)의 일로 이어졌다. 1798년(정조 22년) 유명한 산과 오랜 역사를 가진 절은 황폐해서는 안 된다는 왕의 명령(正祖戊午 以名山舊寺 不可頹廢 有朝命)에 따라 조문(趙門)의 원찰(願刹)인 청계사의 중수를 맡아 1689년(숙종 15년) 화재로 소실된 사찰을 중건하여 선조(先祖)의 사적을 보존시키고 넓은 시설을 확보하여 평양조씨 족보(壬戌譜)의 목판을 보관하였으며 이때부터 이 곳에서 족보도 인쇄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와 문중에 큰 공적을 남기신 공께서 졸하자 정조(正祖)는 공의 노고와 공적을 추념하여 훈신(勳臣)의 특례에 따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管),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의 벼슬을 증직 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이 장신(將臣)은 내 뜻을 알아줌이 깊은 고로 오로지 일을 맡기었으며 관서로부터 관북의 방어를 맡았으며 남으로도 끝없이 이어가며 여러 해를 뛰어넘어 대장단에 올랐다. 저번 화성영의 성 쌓는 역사를 돌아 보건데 전후에 정성을 쏟음과 큰 공을 남기어 놓음이 비록 말(馬)위에서 땀 흘리며 군사를 이끌어가는 수고라 할지라도 전고에 드문 일이다. 높은 공이 큰 간성으로서 나라가 의지함으로 거듭 삼군(三軍)의 명을 맡았고 재상지위에 올랐음에도 족히 그 공을 정려(旌閭)치 못하였으니 어찌 큰 나무가 꺾이어 떨어지고 더 머무르지 않을 줄이야 알았겠는가? 슬픔이 복 바쳐 목이 멤을 깨닫지 못하노라” 하였다.


그리고 공이 성복(成服)하는 날에 해당 예조(禮曹)로 하여금 작위(爵位)와 봉록(俸祿. 爵秩)을 더하여 증직하고 맹부 상훈(盟府上勳)하는 예를 참조하여 절혜(節惠)를 거행하고 부의(賻儀)는 배(倍)로 하여 보내고 관재목(棺材木)을 뽑아 보내 주었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감정동 산 389번지(나진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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